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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백제
1445 2016-07-07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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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사학계에서 비류백제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어 왔다.
비류백제는 실재했을까?

비류백제 관련자료를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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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류백제의 기원

고주몽(고추모 高鄒牟)는 동부여의 금와 왕과 대소 왕자를 피해 졸본 부여로 피해오게 된다. 그곳 졸본부여에서 고추모는 족장 우이(優台, 고어에서는 태를 이로 읽음)의 미망인 소서노(召西奴)를 만나 온조(溫祚)를 낳게 되고 소서노의 전 남편 우이의 아들인 형 비류(沸流)와 함께 BC 37년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우이 + 소서노)간 아들 = 비류, (고추모 + 소서노)간 아들 = 온조
(즉 비류와 온조는 동모이제, 同母異第)

한편 고구려 건국 후 동부여 시절에 결혼하였던 예 부인과 아들 유리가 가신 무리와 함께 고구려로 찾아오자, 소서노의 재력과 세력으로 건국하여 정치적으로 불안하였던 고추모는 자신의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소서노를 정치적으로 배신하고 본부인 인 예 부인을 맞아들이고 그 소생인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에 고주몽 사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서노는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피해 달아나서 중국 발해만 내륙에 위치한 대능하 금주지역(옛 대방고지)에서 소서노와 장남 비류를 중심으로 남부여족과 함께 BC 18년 경, 초기 형태의 백제 국 어라하(於羅瑕) 나라를 이룩하게 된다.

중국대륙 대방고지에서 건국한 이후 인접한 낙랑군과 말갈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 및 남부여족 계통 100개 가문은 선단으로 발해만 해역을 떠나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미추홀로 들어오게 되었다.

중국사서 통전(通典)에는 이때부터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뜻에서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한편 한반도 미추홀에 온 후 온조계 해(解)씨 세력들은 평야지역에서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원했지만 형 비류계 우(優)씨 세력은 한반도 마한 세력을 정벌하고 영토를 늘리려는 야심 찬 계획과 뜻에 서로 의견 충돌로 대립하게 되어 결국 온조계 세력은 비류 백제계와 서로 갈라져서 백가의 1/10을 이끌고 나가 온조 십제(十濟)국을 세워 분국하게 된다.
소서노가 온조의 친부 고추모(주몽)의 정치적 배신행위에 격분하고 있었던 차에 이제 새로운 터전으로 옮겨와 새 나라를 세워 출발하려던 계획이 그의 아들 온조에 의해서 십제 국의 분가로 차질을 빚게 되자, 주몽에 이은 그의 혈통 온조의 배신에 대해 소서노와 비류계 세력은 온조가 있던 위례성으로 쳐들어가 싸우다가 오히려 패하여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전투 장면을 호랑이와 여우들이 위례성에서 싸우는 것으로 은유적인 표현으로 기술 했으며 소서노가 죽은 후에 아들 비류는 땅이 습하고 짠 것을 비관하여 죽었다라고 기술하여 이 기사로 인해서 국내 사학자들이 비류 백제설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가령 소서노와 비류가 죽었다고 치더라도 비류계 추종 세력이 아주 사멸한 것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아무튼 백제국의 역사가 국가 태동 초기부터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누어져 왕권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비극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고 난 후에 한 개의 백제 국에 두 개의 커다란 왕권세력의 진상을 파악해야만 한다.

본 연구회는 위의 두 가지 주장을 면밀히 연구 조사한 결과 김성호 선생의 두 개 백제 설(한성중심-온조 백제, 공주 중심- 비류백제)이 가설로서 학계에 인정받지 못한 것은 온조 백제의 왕력은 잘 알 수 있으나 특히 비류 백제의 경우 초기 왕력이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왕력을 면밀히 연구조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는 한 개의 왕국이지만 초기부터 온조계와 비류계 세력들이 서로 왕권을 빼앗으면서 이들 양대 세력의 왕력이 혼재하여 섞여 있다>는 숨은 사실을 분명히 찾아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추가로 알아야 하는 고대 백제의 성씨관계를 살펴보면, 고추모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온조계는 해씨(解氏), 고씨(高氏), 부여씨(扶餘氏) 등의 왕씨 성을 갖게 되나, 동복형 비류의 경우는 소서노의 전남편 우이(優台)의 아들인 고로 위(倭)족 계통인 우씨(優氏), 진씨(眞氏), 모씨(牟氏) 등의 성씨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 살아남은 비류계 세력과 온조계 세력이 나중 오랫동안 서로 왕권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다가 결국 AD 4C 중엽 비류계 계왕이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정치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이 원인이 되어 비류계 후손 진정 세력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방을 공략하여 임나가라(경북고령- 대가야, 경남 합천- 다라국, 경남 함안-안라가야)를 형성하고 대항한다.

그러다가 제 1차적으로 AD 369년 경 근구수 태자에게 진정 세력이 패하여 왜열도로 도피하고 제 2차적으로 396년 경 고구려 광개토 태왕에게 응신왜왕이 패하여 왜열도로 들어 가서 5C 초에 야마토 왜를 건설하게 된다.


2. 고이왕 계열의 제 12대 계왕은 부여씨 백제왕 인가?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백제 제8대 고이 대왕(AD 234-286)에 대해 제 4대 개루왕(AD 128~166)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아우(同母異第)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고이왕의 출현이 연대 상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므로 삼국사기에서 개루왕의 둘째아들이라 기술한 것은 <개루왕과 같은 혈통을 이어 받은 인물>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 고이왕이 자신의 친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비서실장)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으로 보면 고이왕의 성씨도 부여 씨가 아니라 우(優)씨로서 비류의 아버지 우이(優台)계열 임을 잘 알 수 있다.

제 8대 고이 대왕이 개루왕의 혈통을 지녔다는 앞의 설명은 제 5대 초고왕과 제 6대 구수왕, 그의 아들 제 7대 사반왕으로 이어지는 온조계 와는 혈통을 달리하는 즉 제 4대 개루왕 계열을 잇는 비류계 왕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비류계 고이왕 계열로 제 9대 책계왕, 제 10대 분서왕, 그리고 그의 아들 제 12대 계왕으로 이어지므로 계왕은 KBS 드라마에서 부여 준으로 나오는 부여 씨가 아니라 비류계 우씨가 된다.
중국사서에서는 제 13대 근초고왕부터 부여 씨가 처음 등장하게 되며 이름이 부여구(扶餘句)로 나온다.


3. 대방고지가 한반도 황해도라는 주장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기초한 이론?

KBS 근초고왕 드라마에서는 초기 화면부터 AD 4C경의 한성백제가 서울 강동구 풍납토성 일대로 화면지도가 등장하면서 시작되는데 이는 AD 3C 중엽 제8대 고이왕부터 요서 대방고지에 진출한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에 입각한 것이다.

위나라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으로 동천왕이 백제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고이왕 시절 AD 246년, 진충 장군을 요서지역(현 금주지방)으로 보내 관구검 부대를 물리치고 옛 소서노가 어라하 나라를 처음 세운 대방고지로 재진출하게 된다.

게다가 고이 대왕은 후일 AD 286년에는 요서 대방 지역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교적 화해의 일환으로 결혼 정책을 실시하여 현지 대방 왕의 딸 보과를 자신의 태자인 책계의 왕비로 맞는 결혼정책으로 대방 지역을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확고하게 두었다.

비류계 직계인 제 9대 책계왕과 제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지면서 발해만 지역의 요서백제를 통치하면서 주변의 낙랑군을 정벌하다가 분서왕이 사신으로 온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되어 비류계 왕권이 끊어지게 되고 온조계 구수왕 계열 온조계 제 11대 비류왕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박창범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가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도 삼국사기 백제 기록에 나타 난 개기일식의 최적 관측지로서 AD 4C 경, 한성의 위치가 발해만 내륙지역이라고 과학적 증명을 내세운 주장한 것과도 합치하고 있다.

4. 제 11대 비류왕이 구태라고?

고이 대왕은 중국사서 기록에 나타나는 구이(仇台, 여기서 이끼 <태台> 자는 고어에서는 <이>라고 읽혀서 구태가 아니라 구이라고 읽음)라는 인물과 동일하게 보이며, 위나라 관구검 부대의 후미를 성공적으로 공략하여 환도성을 뺏기고 한반도까지 쫓겨 온 동천왕을 구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류 백제 어라하의 원천 지였던 요서 대방고지 금주지역에 백제 세력을 다시 회복시켰던 것이었다.


5. 백제 제 11대 비류왕이 독살되고 제 12대 계왕이 제 13대 근초고왕에게 양위하였다?

온조계 제 6대 구수왕의 온조계 혈통이라 자처하는 평민출신 제 11대 비류왕(AD 304~344)이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이 지나서 AD 304년, 80세 노구에 왕권을 차지하였다가 그 후 40년 간 통치한 후 120세가 넘는 노령으로 죽는데 드라마처럼 계왕이 독살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잡아보기 힘들다.

당시 비류 백제계는 제 8대 고이왕 시절부터 중국 발해만 지역 대방군에 정착한 후 제 10대 분서왕이 낙랑자객에게 죽은 후에야 왕권에서 멀어져 평민으로 전락했던 온조 백제계 비류왕이 한반도에서 등극하게 되고 대륙 요서에서는 비류 백제계 계왕이 통치하는 두 개의 백제가 존립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비류왕이 계왕에게 독살되었다는 픽션을 가정한 후 그의 사인을 찾는다고 드라마 연속극 초반을 다 허비하고 있는 한심한 실정이다.

온조계 비류왕 사후에 다시 비류계 제 12대 계왕이 왕위를 되찾자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제 13대 근초고왕이 비류계 계왕을 시해하는 등 AD 4C 초부터 그야말로 비류계와 온조계 간의 처절한 왕위 쟁탈전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비류계 왕권 - 제10대 분서왕과 그의 아들 제12대 계왕
온조계 왕권 - 제 11대 비류왕과 그의 아들 제 13대 근초고왕

이리하여 AD 4C 초부터 백제 왕권을 놓고 주도권을 심하게 다투었던 온조와 비류 양대 백제계 정치세력은 4C 중엽 346년, 온조계 근초고왕이 비류계 계왕으로부터 양위를 이어 받은 것이 아니라 선왕 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계왕의 장녀를 강제로 왕비로 삼고 계왕의 친척 세력인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임명하면서 비류계 세력을 무마하려 하려 했던 것이다.


6. 비류계 진정(眞淨)이 국상으로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정치적 결합을 했다?

AD 346년 비류계 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근초고왕이 비류계 세력을 무마하려고 당시 계왕의 장녀를 강제로 근초고왕의 왕후로 삼고 그녀의 친척(실제 동생)이었던 진정을 조정좌평(검찰총장 급)으로 임명하지만 진정은 비류 백제계의 중심인물로서 한반도 내려와 임나가라국(국내 사학계에서는 후기 가야동맹으로 서술)을 건설하고 근초고왕에게 불복하고 대항하는 대표적 인물이 된다.

AD 348년 계왕 세력의 여러 가신과 함께 근초고왕이 지배한 요서백제에서 벗어나 한반도로 들어와 대가야(경북 고령), 안라 가야(경남 함안)를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임나가라국을 형성하고 왜열도 출운국(시마네현)과 월국(후꾸이 현)까지 진출하여 하게 된다.

일본 천황가 신찬 성씨록에서는 마히토(眞人)의 시조로 민달천황이 나오나 진(眞)씨 혈통을 역으로 추정해 올라가 보면 민달의 아버지가 흠명천황이고 흠명의 아버지가 계체천황이며 이 계체의 5대조 할아버지가 바로 응신이고 응신의 아버지가 진정(眞淨)으로 왜국 천황혈통 진(眞)씨의 원조가 된다.


7. 계왕의 장녀가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처녀 시집을 간 후 백제 근초고왕과 재결혼 하였다?

계왕의 장녀가 드라마처럼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결혼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도 안 나오는 엉뚱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계왕의 장녀라는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아보려면 일본서기 신대기에 나오는 천손강림 사건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는 고대 백제인 들이 왜열도로 진출하여 정복한 후 이주하여 정착한 역사적인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신대기의 설화는 고천원(高天原)에 사는 이장락 영존(伊獎諾靈尊)이 그 아들인 소잔오(素戔鳴尊)가 성품이 사납고 비뚤어져 거칠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잔인한 일을 자주하여 자신의 왕위를 이을 인물이 못되어 고천원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 세계인 위원중국으로 추방시키고 장녀인 천조대신(天照大臣, 일본건국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에게는 고천원을 지키는 신녀(神女)로 명한다.
즉 소잔오는 가야지방의 우두령(경북 고령, 소시모리)를 점령했다가 왜열도 출운국(시마네 현)과 월전국(후꾸이 현 쓰루가 지역)으로 진출한다.

그 대신 이장락영존은 성질이 고약한 소잔오 대신에 이복 동생인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을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여 자신의 장녀이면서 소잔오의 누나가 되는 천조대신과 결합시키며 그녀를 고천원을 지키는 신녀로서 명하는 이야기로 되어있다.

여기서 고천원은 백제본국을 의미하며 이장락영존은 계왕을, 고황산영존은 근초고왕을 의미하므로 천조대신은 계왕의 장녀로서 근초고왕의 왕비가 되며 소잔오는 진정으로 임나가라를 개척하며 이 천조대신이 고천원에서 내려와 왜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백제본국에서 왜국이 파생되어 나와 형성된 국가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백제 근초고왕이 계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장악한 후 계왕의 장녀를 강제로 왕후로 삼았다는 것은 온조세력의 비류세력에 대한 정벌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근초고왕으로 대변되는 백제국과 천조대신(백제 계왕의 장녀)으로 대변되는 왜국은 본국과 제후국의 관계, 즉 백제의 속국으로서 왜국이 존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일본 건국의 여신을 상징하는 계왕의 장녀가 고구려에 시집갔다가 근초고왕에게 서로 좋아서 재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온조계 근초고왕이 계왕을 시해하고 그의 장녀를 강압적으로 왕비로 간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8. 진정은 계왕의 아들인가?

일본서기 신대기에서 고천원이란 백제본국을 뜻하며 위원중국은 왜열도를 말하고 이장락 영존은 백제 제12대 계왕을 그리고 고황산 영존은 제13대 근초고왕을 가리키며, 소잔오(素戔嗚)는 당시 계왕의 후손인 진정(眞淨)이며 진정의 손윗누이로서 일본 건국의 시조가 되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은 근초고왕의 왕후가 된다.

진정을 소잔오로 추정해 보는 역사적 근거로는 먼저 일본서기 신대기를 살펴보면, 소잔오가 용맹스럽고 사나워서 잔인함을 일삼고 항상 부르짖는 행위로 인하여 국내의 많은 젊은이 들이 죽고 청산이 말라죽는 등 이변이 속출하였다.

그래서 고천원의 이장락 영존은 그의 아들 소잔오가 너무 무도하여 하늘아래 왕이 될 수 없으니 멀리 위원중국으로 돌아가라고 고천원에서 추방하였고 동생인 고황산 영존에게 양위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 편에는 근초고왕 2년 조정좌평인 진정이 왕후의 친척으로 성질이 사납고 인자하지 못하여서 일에 임하여 까다롭고 세력을 믿고서 자기 뜻대로 행하니 나라사람이 모두 미워하였기 때문에 왕이 조정좌평에서 축출하였다고 나온다.

위의 두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면 소잔오와 진정이 왕권 세력에게 미움을 당해서 왕국에서 추방되거나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고 이장락 영존이 동생 고황산 영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나 비류계 제 12대 계왕이 동복아우 온조계 제13대 근초고왕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장면이 서로 흡사하다는 사실을 보면서 두 사건이 동일한 한일 고대사의 원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 신대기에서 이장락 영존의 딸이 천조대신이고 아들이 소잔오인데 이를 백제와 비교해서 대조해보면 이장락 영존이 계왕이므로 천조대신은 계왕의 장녀가 되며 계왕의 아들은 진정으로 추정되게 된다.


9.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왕인과 아직기는 위장된 인물이다

1) 왕인 박사가 왜국에 천자문 등 한자를 보급하였다?

왕인이 백제의 학자로서 왜열도에 천자문 등 학문을 보급하기 위하여 파견한 공신이라면 이러한 중요한 기록이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백제 어느 왕 때 왕인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왜 나오지 않는가?

앞서 AD 4C 한일고대 관계에 대한 연구를 자세히 해보면 근초고왕이 왜열도 정벌 시절인 370년대 당시 왜열도에는 원주민에 의한 별도의 국가가 전혀 형성된 바가 없었고 단지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에게 쫓긴 비류계 계왕 세력인 진정과 그의 아들 응신이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었고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과는 전투 중이었다.

즉 AD 근초고왕 당시 왜열도에는 왕인이 한문을 전수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야마토 왜국의 국가조직체제와 학교와 같은 교육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응신은 AD 397년 왜열도로 와서 AD 410년경까지 남쪽으로 큐슈 일향 국으로부터 동쪽 센다이(仙台)까지 대장정 끝에 왜 열도를 평정하여 야마토 왜 국가를 확고하게 정착시킨다.
그 후 AD 425년이 돼서야 비로소 야마토 왜의 응신은 송나라로부터 안동(安東)대장군 왜국 왕으로 인정받아 왜 열도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는다.

더욱이 일본서기 기록처럼 왜국의 요청으로 백제에서 왕인을 학자로서 보냈다면 우리나라 삼국사기 근초고왕 편에 왕인을 왜열도에 파견하였다는 사실이 나와야 하며 만일 실제로 한자를 전수하러 백제의 신하자격으로 파견되었다면 당시 응당 소정 연수기간이 지난 후 가족이 사는 백제로 귀국해야지 어째서 왕인은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아주 이주해가서 살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응신 왜왕(일본 제 15대 천황으로 등극)이 백제 아직기로 부터 왕인 박사를 초청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응신이 즉위한 390년 시절(일본서기에는 270년 즉위한 것으로 나타나나 120년 조작설을 하여 390년으로 조정), 근초고왕은 375년에 이미 사망하고 없었기 때문에 근초고왕 시절 왕인박사를 응신 왜왕에게 파견했다는 것은 연대 상으로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이 왜열도로 도피한 비류계 저항세력을 제압하려고 진출한 것을 감추기 위하여 일본서기에서 천자문을 전달한 백제의 학자로 둔갑시켜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한 것이다.

한편 대조선 제국사를 그린 김산호 선생은 응신을 왕인(王仁)박사와 동일한 인물로 보아 응신왕인(應神王仁)으로 보아 두 사람의 한자 발음이 크다(大) 많다(多) 높다(高)는 의미의 <오오진>으로 똑같이 읽혀진다고 하면서 왕인의 일본식 발음인 <와니>는 왕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문자의 받침이 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 아직기는 말을 사육하는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AD 384년 침류 태자가 제 15대 백제 왕위에 오른 후 다시 한 번 제 3차로 왜열도 정벌에 나서게 되어 앞서 제 1, 2차 왜열도 정벌에서 사망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두 선왕의 복수를 갚고자 공격한다.

그러나 난파(오사카)앞 담로도(아와지 섬) 출전읍 다사성까지 진출한 침류왕 군사가 무내숙미에게 승리한 응신 군대에게 눌려서 불리한 전투상태가 계속되자, AD 385년 침류의 요청으로 아신 태자는 군사적 지원을 위해 백제 기마병 17000명을 앞세우고 왜열도로 오게 되고 침류 백제군에 합류되게 된다. (일본서기에 아직기가 17현의 군사와 말 2필을 가지고 일본으로 왔다는 기사)

여기서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과 말을 전한 아직기에 대한 서술은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아니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사로서 앞서 살핀 근초고왕이 왜열도를 정벌하러 온 사실과 아신 태자가 기마병을 가지고 부친 침류왕을 지원하러 왜열도로 들어 온 사실을 각각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록이다.

일본인 사학자 들이 고대 백제인 들이 왜열도로 이주하여 야마토 왜국을 세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친일 사학자에게 일본서기에 나타 난 위장된 기록대로 백제와 왜국이 별개의 독립된 나라로서 단지 백제가 왜국에게 한자와 말 기르는 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등 문화와 기술을 전달한 것으로 바꾸어 가르쳐 혼동을 주려고 한 내용인 것인데 KBS가 이를 드라마로 만들어 일제 식민사관을 더욱 굳히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천부경 위서론
단기연호 사용사례 및 대통령 개천절 참석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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