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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
1447 2017-02-03 117
첨부파일: 1486101879.jpg [ 48KB ]

우당 이회영 선생 자료


이회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한갑족(三韓甲族. 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 집안 출신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11세손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서 연이어 10명의 재상(4명의 증영의정을 포함, 9명의 영의증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조선조 최고의 명문이다. 해방 후에는 이회영의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초대 부통령을 역임해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 이회영의 아버지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이회영은 1901년 근대적 신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포(蔘圃)를 경영하다가 일본인들의 약탈로 실패한 뒤 1908년 장훈학교(長薰學校)를 설립하고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행동강령으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만주에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고 전 재산을 처분한 뒤 1910년 12월 추운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인 이회영이었다. 그때 처분한 재산이 사료에 따라 조금씩 추정치가 다르나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만주로 간 우당 6형제는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 ~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등이다. 이때 만주로 가던 이회영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배로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정착하여 인근의 땅을 매입하고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경학사는 계몽운동의 이념이었던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2~1913년에 걸친 흉작으로 곧바로 운영난에 부딪힌 데다 중국 관헌들의 탄압까지 겹쳐 1914년 해산되고 만다. 경학사는 3년 정도밖에 운영되지 못했으나, 그 조직경험은 그 후 중국 동북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신흥강습소도 후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로 개편돼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학교의 교주(校主)는 둘째인 이석영이 맡았고, 교장에는 석주 이상룡(李相龍), 교관으로는 이동녕, 윤기섭, 이관직, 여준 등이 있었다. 학비와 숙식에 드는 비용은 모두 무료였다. 그 비용을 우당 집안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온 재산으로 충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제1회 졸업생은 변영태, 김훈, 김도태, 이범석, 오광선 등이었으며, 우당의 아들인 이규학(李圭鶴, 1896~1973)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학교가 1930년 폐교될 때까지 배출한 수 천 명의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의 감격적인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자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고종의 망명 계획 실패 이후, 이회영 일가는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게 된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기가 일쑤였으며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옷까지 팔아 겨우 연명할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 하나 바깥으로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우당은 생활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 상하이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21년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며 분열된 임시정부의 단합을 위해 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후 1925년에는 비밀결사조직 '다물단'의 배후 역할을, 1931년에는 한중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또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조직하여 활동해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11월 지린성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 공작망조직과 만주 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도중 끝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이역 땅에서 옥사하게 된다. 우당의 나이 이미 환갑이 훨씬 지난 65세였다. 우당의 6형제 중 5명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타국 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또한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인 성재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성재는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1951년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불의를 보면 좌시하지 못하는 가문의 전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된 셈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형제는 물론 그 자제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그들 또한 이국땅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고 상당수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전 국정원장 이종찬과 국회의원 이종걸이 우당의 직계손자들이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 가족이 고난의 길을 자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일화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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