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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소파 방정환 선생
2017-05-04 451
첨부파일: 1493880044.jpg [ 30KB ]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소파 방정환 선생의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최초로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어린이의 영원한 벗이자 독립운동가인 방정환 선생의 일생을 소개합니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어린 방정환은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17년 방정환은 상고를 다니다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사환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 때에 방정환은 소년입지회에서 동화구연, 토론회에 참여하며 어린이를 위한 놀이와 문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방정환은 이후 천도교 핵심인물로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33인 중 한 명이되는 권병덕 선생이 그를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에게 소개해 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요.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의 딸 손용화 여사와 결혼하게 되면서 천도교의 정신적, 물질적, 조직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때부터 청년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갑니다.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소설, 수필, 시 등을 발표하며 문학가로서의 삶도 시작하게 되죠.

1919년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청년회 회원으로 만세운동 준비에 협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동료 오일철과 함께 자택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방정환 선생은 1921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를 조직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방정환 선생은 조금 다른 성격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요. 1922년 5월 1일, 천도교 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 제1회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이는 현재 5월 5일 어린이날의 기원이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1923년 3월 20일 소년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 4월 30일 동경에서 손진태, 윤극영, 진장섭, 고한승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며 어린이의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정서적, 문화적 계몽에 힘씁니다.


선생은 어린이의 현실적,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해방을 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 및 동화 ‘사랑의 선물’ 등을 집필하고 윤석중, 이원수, 서덕촌 등 아동문학가를 발굴·육성하며 최초로 동화문학 장르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방정환 선생의 민족 계몽 운동의 청사진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고,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과 재정난 등은 그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선생은 그해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정부는 방정환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소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방정환 선생. 무장독립운동과 더불어 우리 민족을 이끌어갈 세대를 계몽시켜 민족성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 역시 독립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사와 어린이들의 인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방정환 선생의 업적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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