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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조경환 선생
작성자 : 관리자(test@test.com) 작성일 : 2018-12-09 조회수 :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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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전국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의병활동이 전개될 때, 읽고 있던 책을 던지고 총과 칼을 들었던 분이 있습니다. 바로 조경환 선생인데요. 일제의 탄압에 의병장으로서 일제에 맞섰던 조경환 선생이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선생이 태어난 19세기 말부터 조선왕조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학을 공부했던 조경환 선생은 전국 각지를 돌며 산천지세를 파악하고 조선 정국을 살폈습니다. 이때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그러던 선생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1905,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을사늑약에 반발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선생 역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선생은 1906년 태인에서 을사늑약에 반발해 최익현, 임병찬 선생 등 순창 12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서울로 압송되었고,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의병이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1907년 후반 호남지방에서 기삼연, 김준 선생 등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는 등 맹활약을 떨치자 선생은 그 해 12월 중순 김준 선생이 이끄는 의병의 군진(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으로 활동합니다

조경환 선생은 함평읍, 창평 무동촌, 광주 어등산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습니다.

1908년 어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대패하여 의병장 김준 선생이 순국하였는데, 이때 조경환 선생은 함평의 당산촌 나평집 가옥에 잠적하며 일본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기도 했습니다. 함께 의기투합하였던 김준 선생을 잃은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선생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의진을 재건하기로 결정합니다.
일제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흩어진 의병들을 모아 전열을 정비하고 전북 이석용 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 선생과 연합하여 200여 명 규모로 의진을 재편합니다. 그리고 선생이 의병장을 맡으며 눈부신 항일투쟁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의진 전열의 재정비를 마친 선생은 먼저 김준 선생에 대한 장례를 치른 후, 일제에 맞설 준비를 합니다. 곧 용진산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광주 흑석에 있는 일본군 순사대를 공격하며 의병장으로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합니다.

조경환 선생의 의진은 1~200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남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습니다.
 
19091월 혹한기를 맞아 선생은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고, 일부 귀가하지 않은 의병 50명을 이끌고 어등산에 주둔했습니다. 이때 일본군 광주수비군이 조경환 선생 의진의 주둔 사실을 간파했고, 일본군은 이들 의병을 포위·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19091, 조경환 선생의 의진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20, 체포 10명의 피해를 입었고, 무기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때 선생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서도 부하들의 명단을 불사르며 어등산 전장에서 장렬히 순국했습니다. 정부는 1963, 조경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조국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어등산 의병장의 길을 택했던 조경환 선생. 순국 직전까지도 조국과 부하들을 걱정했던 11월의 독립운동가, 조경환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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