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
유관순열사-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한입니다.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6-06-23 조회수 : 1204
파일첨부 :

[27]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태극할배가 들려주는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이야기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유난히 추운 엄동설한, 유관순 열사 동상에 눈이 쌓였다. 온몸으로 눈을 맞으며 당시 빼앗긴 나라의 실정을 보여 주는 듯하다. 

“내 혼자 모든 추위와 고통을 겪을 터이니, 
대한의 후손들이 다시는 비극에 빠지지 말라.”

 

사진,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의 유관순 열사 동상(촬영, 양영수)
이렇게 당부하는 유관순 열사의 마음과도 같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1월 17일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서 30리 떨어진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 님’, 어머니 ‘이소제 님’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난다.

자랄 때는 비석치기 같은 놀이도 즐겨하여 선 머슴애 같은 면모도 있었다. 동네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남동순’ 선생은 유관순 열사의 어릴 적 모습은 강하고 활발했다고 증언한다. 이화학당 재학 시 학생 유관순은 계단을 내려올 때 난간을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기도 하는 등 ‘장난꾼’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김혜정 님 증언) 

그러나 나라의 상황은 ‘유관순’ 열사가 곱고 활발하게 자라기에는 너무나 엄혹하였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독살설에 의해 1919년 전국적으로 3·1 만세운동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일제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재빨리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하여 임시휴교령을 반포한다.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한다. 3월 13일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한다. 

인근의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락에도 연락처를 두고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조직해 나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당시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소녀 ‘유관순’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천안에서 곧바로 들이닥친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유관순’의 부모님과 오빠 등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만다. 아우내 장터는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피바다가 되었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다. 

‘유관순’은 재판 중에 오히려 재판관들을 꾸짖는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그 결과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어 온갖 탄압과 고문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 무엇도 가녀린 소녀 ‘유관순’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지속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옥에 갇힌 동지들의 사기를 북돋는다. 특히 다음 해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다시 지하 감방으로 끌려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다. 

이후로도 무려 8개월에 걸쳐 옥중만세와 고문, 또다시 고문과 만세가 이어진다. 1920년 10월 12일 미처 피지 못한 꽃송이가 되어 18살의 나이에 순국한다. 죽음을 직감한 장난기 많고 꿈 많던 소녀는 세상을 하직하는 유언을 남긴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의사(義士)’는 뜻을 이룬 애국자이고, ‘열사(烈士)’는 뜻을 이루지 못한 애국자이다. 비록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으나 ‘유관순 열사’는 영원한 ‘대한의 누나’이자 영원한 ‘인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우리의 수많은 소녀들이 일본 군대의 위안부로 전장 터로 끌려갔고, 위안부 소녀상이 곳곳에 서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은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있다. 

다시는, 다시는 이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한의 후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일이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전국민족단체 연합 대표회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
이전글 내가 중국,일본, 미국을 보며 부러운 것이 딱 한가지 있다.
다음글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弘岩 羅喆)과 신의 날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